[한경에세이] 양념보다 자연

입력 2020-11-03 16:47   수정 2020-11-04 00:08

연말로 갈수록 시간은 더 빨리 달린다. 입추(立秋)가 엊그제였는데 벌써 상강(霜降)이 지났다. 중국은 고대부터 1년을 24절기로 나누고 그 절기에 맞춰 작물을 심고 거두었다. 지금은 드론으로 농사일을 할 정도로 농업 방면의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, 우리는 여전히 절기에 따라 삶을 이어가고 있다.

요리사인 나는 새해에 달력이 생기면 맨 처음 상강에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둔다.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짧은 볕과 그늘을 적절히 활용해서 시래기, 표고, 무 등을 말려야 한다. 그래야 겨우내 마음이 든든하다. 상강은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리는 절기다.

상강을 지나면 주부들의 일손은 1년 중 가장 바빠진다. 가을걷이가 끝나자마자 김장 준비를 해야 한다. 가족들은 소풍을 가는 마음으로 무, 배추를 심어 놓은 밭으로 향한다. 무는 제 스스로 땅 위로 올라온 듯 푸르디푸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. 어머니가 무를 뽑아봐라 하시면 언니 오빠들은 일제히 두 손으로 무청을 잡아당기고, 무는 기다렸다는 듯이 쑥 올라온다. 흙을 툭툭 털어내고 한 입 베어 문 다음 엄지손가락 한쪽으로 힘을 주어 껍질을 벗기면 무는 용수철처럼 동그라미를 그리며 껍질을 벗어 던졌다. 한 입 베어 물면 그야말로 물이 뚝뚝 떨어진다.

어머니는 “옛날에는 무가 귀해서 먹고 싶어도 못 먹을 때도 있었다. 서리 맞은 무는 먹고 트림을 안 하면 인삼보다 더 좋은 음식이니 있을 때 먹어두라”고 하셨다. 서리 맞은 무여야 동치미를 담아도 시원한 맛이 나고 무말랭이를 만들어도 옥빛이 곱다. 배추도 서리를 맞아야 속이 꽉 들어차면서 단맛이 난다. 이것이 상강을 지나야 김장을 하는 이유다.

요즘은 식품을 저장하는 기술이 발달해 시장에 가면 1년 내내 무를 살 수 있다. 그러나 제철이 아니면 ‘무에 바람이 들지는 않았을까’ ‘무 비린내가 나지는 않을까’ 걱정하면서 사야 한다.

최근 ‘집콕’ 생활에 TV 프로그램은 너도나도 먹방이다. 누가 더 맛있게 만드나, 어느 집 음식이 더 맛있나 매일 대결이 펼쳐진다. 그래서 요리사들은 더 많은 양념을 넣기 위해서 고민한다. 하지만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양념보다는 자연의 신선함을 더 원한다.

요리하는 사람들은 제철이 아닌 재료에 얼마나 많은 양념을 넣을 것인가 고민할 일이 아니라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머금은 제철 재료에 양념을 조금이라도 덜 넣어서 상에 올릴 고민을 해야 한다. 양념을 더해서 맛있게 만드는 일보다 양념을 빼서 신선한 맛을 내기가 더 어렵다.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만든다. 그래서 프랑스 미식가 앙텔므 브리야샤바렝은 당신이 먹는 음식을 말해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?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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